VOL.258 SPRING 2021

#부산 그라피

부산 근대화의 중심지동천

 

동천은 부산의 최대 도심인 서면 인근을 흐르는 4.85㎞의 도심하천이다.
부산진구 개금동에서 발원해 초읍동, 동구 범일동을 거쳐 북항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부산진성의 동쪽으로 흘러서 동천이라고 불렸다.
부산 산업의 흥망성쇠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동천은
이제 부산의 미래를 키워나갈 금융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편집부
사진 이복환
일러스트 서훈주

한국 근대산업을 꽃피우다

부산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동천은 부산의 근현대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특히 눈부시게 발전했던 부산의 산업을 대표하는 곳으로 한국 산업화의 태동지이자 부산 근대화의 중심지로 손꼽힌다. 한국 산업의 부흥기인 1950~1980년대 부산은 물론 한국의 경제를 이끌었던 기업의 발원지로 널리 알려졌다.
부산은 천혜의 항만을 갖춘 대륙의 관문으로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무역의 전진기지였다. 1948년 부산항을 통해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은 대부분 농수산물과 광산물이었다. 반면, 수입품목으로는 생고무가 가장 많았다. 그만큼 부산에 고무공장이 많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동천과 부전천 일대에는 한국전쟁 때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피란민들의 풍부해진 노동력을 바탕으로 진양고무, 태화고무, 삼화고무 등 국내 6대 신발 기업이 자리를 잡았다. 이 회사들은 왕자표, 말표, 범표와 같은 상표의 신발을 생산하면서 1970~19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부산의 산업 공장들은 1960~1970년대 동천을 중심으로 하나둘 들어섰다. 이들 기업 중에는 현재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이 많다. 이 일대에서 많은 기업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원자재와 완제품의 수출입이 이뤄지던 부산항(북항)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부산항에서 하역한 각종 원재료가 동천 물길을 타고 서면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사통팔달의 교통로이자 유동인구의 중심지였다. 동천 주변 일대가 한국 근대산업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이유다.

국내 굴지 기업의 역사와 나란히

지금의 부산교통공사 자리에는 합판 수출로 유명했던 동명목재가 자리했고, 맞은편 부전우체국 자리에는 삼성그룹의 모태인 제일제당이 들어섰다. LG 브랜드의 뿌리인 럭키공업사는 연지동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고, 대우자동차의 전신 격인 신진자동차는 전포동에서 시작됐다. 이렇듯 동천의 근현대 역사는 국내 굴지 기업들의 태동과 함께 시작됐고, 이들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한다. 동천의 역사를 논할 때 이곳에서 기틀을 다진 기업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기업의 성장과 발전 속에서 동천도 함께 변모하고 변화했다.
그 중에서도 한때 부산의 중심 상권이었던 조방앞 거리는 부산 사람들은 대강 어디쯤을 말하는지 알 정도로 부산에서는 고유명사화 된 곳이다. 이곳은 1917년에 설립되어 1968년 문을 닫은 조선방직 공장이 있던 자리로 ‘조방’은 조선방직의 줄임말이다. 동천이 부산 근대화의 역사를 품고 기억하고 아파하는 하천이라면, 조방은 동천을 젖줄로 태어났다 사라지면서 부산시민들의 고단했던 삶을 압축한 이름이다.

동명목재

신진공업사

1925년 좌천동에서 제재소로 시작한 동명목재는 광복 직전 동천 변에 있는 범천동에 합판 제조 및 제재공장을 세웠다. 이후 확장 이전해 1949년 상호를 동명목재상사로 바꿨다. 단일품목으로 국내 최대 수출을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하며 한때는 세계 최대의 합판공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해방 직후에도 사업은 번창했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수요가 폭발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이를 바탕으로 범천동에 이어 용당동과 학장동, 대저동 등 부산 곳곳에 계열사를 세우며 사세를 확장했다. 1963년에는 남구 용당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이후로도 10년간 놀라운 실적을 거뒀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 무리한 사업 확장, 신군부와의 마찰로 1980년 결국 해체됐다.
1953년 여름에는 동천 변에 엄청난 규모의 공장이 들어섰다. 바로 제일제당이다. 마산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다 대구에 삼성상회를 세운 이병철 회장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만든 첫 제조업체가 제일제당이다. 이곳에서 국내 첫 정제 설탕이 생산됐다. 당시만 해도 설탕은 100% 수입에 의존하던 사치품이었고, 제당 부문은 최첨단 산업에 속했다. 설탕이 대중화되면서 명절이나 병문안 선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제일제당은 이듬해 공장을 증설했고, 1957년에 제분공장을 세우는 등 몸집을 키워나갔다. 생산능력이 확대되면서 하루 50톤의 설탕을 만들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전체 소비량의 30%를 넘는 수준이었다. 1962년에는 최초로 설탕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럭키공업사

경남모직

LG 브랜드의 모태가 된 럭키는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됐다. 1955년 대신동에서 연지동으로 공장을 옮기면서 국내 최초로 국산 치약을 대량 생산했다. 1970년대까지 시장점유율이 무려 98%에 달했고, 럭키치약이라는 상표가 보통명사로 쓰일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밖에 대상그룹의 바탕인 미원식품, 한일그룹을 탄생시킨 경남모직, 태광그룹의 기원인 태광산업, 대동벽지, 부산방직공업, 태화백화점 등 수많은 기업이 이 일대에서 활발한 산업 활동을 펼쳤다.

태화백화점

제일은행

산업경제 메카에서
금융 중심지로 변모

부산 경제의 터전이자 근대 한국 산업경제의 원천이었던 동천은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극심한 오염으로 로 남았고, 동천의 수질 개선을 위한 하천 정화사업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당시 번성했던 산업 활동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동천의 영광도 과거의 것이 됐다. 그 빈자리를 이제 금융이 채우고 있다. 부산의 금융은 1877년 우리나라 최초로 부산에 사설 일본 제일은행지점이 개설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 은행을 모체로 1878년 일본 제일국립은행 부산지점이 개설됐고,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구 한국은행(후 조선은행)이 창립될 때까지 중앙은행 기능을 담당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으로 부산의 금융 규모도 급격히 늘어났다.
부산이 제2의 금융 도시로 성장할 잠재력을 인정받고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9년 서울과 함께 금융 중심지로 지정되면서 부터다. 이후 동천 주변에 문현금융단지가 조성됐다. 부산 도시철도 2호선 국제금융센터·부산은행역 옆으로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서고 부산은행 본점, 기술보증기금, 한국은행 부산본부 등의 각종 금융기관과 공공기관이 입주했다. 특히 지난 2014년 완공한 부산의 랜드마크 부산국제금융센터(BIFC)는 동북아 금융 활성화의 근간이 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곳에는 한국예탁결제원을 비롯해 한국거래소,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남부발전, 한국주택금융공사, 주택도시보증공사 등 금융 관련 주요 공공기관들이 대거 입주해 있다. 지난해 말에는 해외 금융기업을 유치해 화제가 됐다. 비단 금융기관뿐만 아니다. 부산시는 창업기업 등을 육성해 부산국제금융센터 일대를 스타트업 메카로 키워 옛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지다.
동천 일대는 한국 근대산업을 일으켰던 곳이다. 그 자리에 들어선 부산국제금융센터와 그 일대가 부산을 넘어 한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기 위해 거듭나고 있다. 동천에서 부산의 과거와 미래가 만나고 있다.

발행인이명호

발행처한국예탁결제원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금융로 40 부산국제금융센터(BIFC)

기획·디자인·제작승일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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